들어가며 - 일제 시대와 6.25의 이미지
90년대생인 저는 일제 시대와 6.25에 대해 묻는다면 간접적으로 보았던 '슬픈 역사다'. 이렇게밖에 못 말할 것 같아요.
경험한 것도 없을 뿐더러, 기껏 본 것이라곤 교과서에서 나오는 흑백 사진들과 기록, 수학여행 때 종종 갔던 전쟁기념관과 중국 여행 때 갔던 뤼순 감옥 등의 차가운 공기가 흐르는 장소의 기억 정도가 전부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 책을 본 뒤에는 글이 기억을 저장하는 좋은 순기능을 한다는 느낌에 빠져들어서 읽었습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개성과 수돗물 펌프질, 아궁이에 불 때면서 먹는 콩깻국 등 저에겐 너무나도 생경한 경험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저자의 기억을 바탕으로 써내려간 자전적 소설에서 나오는 생생한 묘사는 저에게도 충분히 공감대와 집중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습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일제 시대부터 광복 후 전쟁 초기까지
저자는 개성의 박적골에서 태어난 이후 아버지가 시골에 있다는 이유로 건강했는데도 황망하게 떠났던 모습을 보며, 저자의 어머니는 기여코 좋은 곳에서 학습하고 자라도록 서울로 거처를 옮겨 사립 학교에 입학시킵니다. 자라는 과정에서 겪은 호적 속이기 학습, 창씨 개명 강요에도 꿋꿋이 반대한 오빠의 모습, 해방 뒤 혼란한 상황에서 서울대에 입학한 저자 등의 과정을 묘사합니다. 이 과정에서 생기는 숙부네와의 보이지 않는 갈등, 그 시대의 생활 모습, 학업 생활 등이 마치 직접 경험하는듯이 소설에 써내어 깊은 몰입감을 받았습니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싱아풀은 한국의 여러 지역에서 자생하는 흔한 풀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어릴 적 고향에서 싱아풀을 뜯어 먹으면서 속잎의 연한 부분을 먹으면 새콤달콤한 느낌이었다고 저술하며, 서울에서는 그 흔한 싱아풀마저 보기 힘들고 비리고 들척지근한 아카시아만 보인다는 한탄에서 제목을 따왔습니다. 그만큼 서울 생활에서 보이지 않는 어릴 적 싱아풀은, 그 시절 수없이 바뀌는 격변의 시기를 상징하는 의미가 되겠다고 느꼈습니다.
이후 '빨갱이'라는 딱지를 받지 않기 위해 피난을 떠나려 했으나 너무 늦게 돌아온 오빠 때문에 공산 치하에서 숨듯이 서울 생활을 하였고, 이후의 일들을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로 이어 써내렸습니다.
이데올로기 갈등 하에서의 목숨을 건 선택들 -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소설은 북한이 점령한 서울의 상황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별 수 없이 빈 집을 찾아 숨은 듯이 생활을 하고 다른 집의 식량을 슬쩍해 연명하다, 북한군을 만나면 그들에게 본인들이 같은 사상을 지향한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등의 생활을 합니다. 그러다가도 다시 국군이 서울을 수복한 뒤에는 북한에서 발급한 증명서를 곧장 아궁이에 태워버리고 이전에 발급했던 시민증을 꺼내는 등의 줄타기 생활을 반복합니다.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누구에게든 총부리를 겨누는 상황을, 저자가 한 말은 아니지만 공감간다고 했던 이야기가 소설에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욕먹을 소리지만 이런저런 세상 다 겪어 보고 나니 차라리 일제시대가 나았다 싶을 적이 다 있다니까요. 아무리 압박과 무시를 당했다지만 그래도 그때는 우리 민족, 내 식구끼리는 얼마나 잘 뭉치고 감쌌어요. 그러던 우리끼리 지금 이게 뭡니까. 이런 놈의 전쟁이 세상에 어딨겠어요. 같은 민족끼리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 형제간에 총질하고, 한핏줄을 산산이 흩트려 척을 지게 만들어 놓았으니......."
북한군이 후퇴할 당시 누구는 서울에 남고 누구는 같이 올라가는 등의 선택을 하는 등 이데올로기의 갈등으로 생이별을 해야 할 상황을 저술하면서, 지금까지도 상처와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는 한 민족 사이 대립의 배경이 어떠했는지 글을 통해서 몸소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이후 올케의 임기응변으로 북으로 꼼짝없이 갈 위기는 모면하지만, 한 번의 선택으로 돌아올 수 없는 결정을 하는 것과 심지어는 목숨과도 바꿔야 했던 당시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어 씁쓸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습니다.
이후 남한 치하의 서울에서 저자는 서울대 학력을 영문과를 나왔다는 것으로 속여 PX에 근무할 수 있었고, 달러 암표상, 미국 물건을 시장에 파는 상인, 초상화를 그려 미군에 파는 초상화부 등 당시 미군과의 모습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상황 속에서 연애를 하고 결혼을 결심하면서 소설을 마무리하는 작가의 모습도 엿볼 수 있었구요.
마치며 - 어림짐작했던 당시의 기억을 경험하는 듯이 제공하는 책
첫 부분에도 얘기했지만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교육을 통해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의 상흔을 간접적으로나마 알 것입니다. 하지만 박완서의 소설만큼 당시 상황에 몰입할 수 있고, 비교적 젊은 사람들에게도 위화감 없이 이해하며 경험할 수 있는 매체는 쉽게 찾기 힘들것이라고 생각해요.
언뜻 소설의 배경이 지금과는 너무나도 판이해 와닿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으로 책을 읽었지만, 다 읽은 뒤에는 누구보다도 일제 시대와 6.25 전쟁 당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자전소설이어서 추천하고 싶습니다.
마침 독후감을 삼일절에 쓰네요. 독립운동을 했던 당시 사회상과 그 이후의 혼란 속으로 들어가보고 싶다면 이만한 책이 없을 것 같습니다.
**결혼 생활 이후를 저술한 책은 <그 남자네 집>이 있다고 하네요. 읽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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